2009년 01월 23일
이를 뽑았습니다.
사흘 전부터, 윗니 중에서 입 안 쪽으로 말려들어간 앞니 하나가 시큰거려 견딜 수 없었습니다.
찬 물 더운 물 다 시리고, 나중엔 입 열고 숨만 크게 들이쉬어도 입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 때문에 아파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.
그래도 짝지에게 말도 안 하고 닥치고 있었습니다.
말하면 치과 가서 뽑으라 할 테고, 치과 가는 건 너무 무서우니까요.
'천하장사도 치통은 못 이긴다'라던데, 저에게는 '치통도 치과 가는 공포는 못 이긴다'입니다.
결론은 천하장사 따위 치과의사 앞에서 꿇어...
아무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어제 치과에 갔더니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여기 저기 두드려보고 바람도 불어보고 하시더니..
'이에 금이 갔네요. 썩은 것도 아니고 금이 갔거나 속에서 부러졌거나 한 겁니다. 그런데, 이게 쓸데없는 덧니가 아니고, 앞니 중에 하나라서 나중에라도 치열 교정을 하실 거면 치료를 길게 보고 해야합니다. 교정을 안 하실 거면 어차피 지금 치아로서 하는 일도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놈이니 빼버리는 게... '
교정하는 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도 무지하게 들어가고, 결정적으로 아프잖아요!!!!
교정 따위 생각한 적도 없는 터라 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. 어제는 수업이 있으니 행여 뺐다가 말을 못 하게 되는 사태가 오면 안 되므로, 오늘 빼기로 했습니다.
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되는데, 무서워서 출근하기가... 아. 무섭습니다. 무서워요. 치과는 정말 무서워요.
제가 이렇게 치과를 무서워하게 된 이유는 지난 2002년 여름. 월드컵이 시작되기 몇 달 전에 사랑니를 뺀 적이 있습니다.
그런데, 사랑니 뿌리가 굽을대로 굽은 데다가 위치도 애매해서 말이지요.
안 빠지는 걸 치과용 도끼로 세 조각을 내서 힘으로 뽑았더랬습니다.
도끼로 치는 소리, 치과용 전기톱으로 갈아내는 소리. 마취를 했지만 귀는 살아있으니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오던 그 소리.
한참 빼던 와중에 천하장사 따위 무릎 꿇려버리는 지상 최강 치과의사 선생님이 이를 악물고 하시던 그 목소리.
"잠깐만..흡.. 참으세요.. 헉헉... 저도... 이걸.. 제가.. 흡.. 왜..액.. 뽑자고 했는지 후회가..악.. 흡흡.. 됩니다."
틀림없이 땀방울이 얼굴에 흐르는 게 명백한 그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.
그리고 집에 가서 마취 풀리고, 그 날 내내, 이튿날 아침까지 정말 방 안을 굴러다녔습니다. 방바닥 내리치느라고 손바닥이며 주먹에 피멍 들고.
아무튼 갔습니다.
이름만 런*치과인 줄 알았더니, 선생님이 *던 소재 대학을 나오신. 그래서 발음이 찬호팩 선수 발음과 약간 비슷하신. 모든 기구가 영국식이라고 써붙여놓은 걸 보고서 저는 "그럼 우리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기구는 아닐까? 아니, 한국인 치열과 다른 기구 아냐? 혹시 한국에서 인정 못받으신 건 아닐까? 어제 왜 이걸 생각 못했지?" 라고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온갖 망상을 떠올렸습니다.
양처럼 끌려들어가서... 불이 켜지고.. 에.. 입천장에 마취하다 보니 마취만으로도 아프고.. 그러다가..
"다 뽑았고요. 이제 꿰맵니다"
네? 뽑았어요? 뭘? 이를? 아니.. 정말? 힘 몇 번 주고 별 소리도 없었는데? 톱은? 도끼는? 에? 이거 마술?
역시 치과의사 선생님은 지상 최강이십니다. 특히 제 이를 이번에 뽑아주신 선생님께서는 효도르 따위 손짓 한 번에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내실 우주 최강이세요. 암요.
마취가 풀리고 있습니다.
살려주세요.
# by | 2009/01/23 18:02 | 하루 | 트랙백 | 덧글(2)





☞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(트랙백 보내기) [도움말]
난 아직도 사랑니 없다. ㅎㅎㅎ